나는 왜 사는가

왜 사는가(lives)와 같은 질문에는 딱히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왜 사는지(buy)는 궁금하다. 나에게 물건을 사는 행위란 어떤 의미일까. 그간 대단한 의미가 없었을지라도 지금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계속 살 수 있을테니까. 이 기록은 계속 무언가를 사제끼기 위한 나의 항변이자 의미부여, 정당성 확보를 위한 발버둥이다.

패셔니스타가 되고 싶어서

첫번째 이유라면 단연 이것이다. 기성복도 그냥 입는 법 없이 자기 몸에 맞게 바느질해 고쳐 입으셨던 할머니의 손녀이자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엄마, 아빠의 딸인 내가 ‘패셔니스타’가 되고싶은 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닐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셨던 병실에서 고모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와중에도 나에게 “목도리 다려서 매고 다니라”고 말했을 정도니 집안 대대로 패션과 관련한 끼가 흐르고 있다고 우기고 싶다. 하지만 패셔니스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저 사람 참…. ‘비싼 옷 입었구나’ 정도에서 감탄이 끝난다면 돈을 쓰고도 그것만큼 딱해보이는 일이 없다. 하지만 돈을 많이 써서, 많이 사봐야 안다. 내가 어떤 스타일의 옷이 잘 어울리는지, 연한 분홍색이 나은지 쨍한 핑크색이 나은지, 비슷비슷해 보이는 화이트 티셔츠도 절대 똑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안 입어본 스타일에 도전하고, 유행이라면 또 도전하고, 내가 제일 멋져보일 수 있는 아웃핏을 찾아 헤맨다.

스트레스 해소

쇼핑만큼 즉각적인 스트레스 해소방법이 또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 심지어 샤넬, 루이비통 가방을 사는 것과 텐바이텐에서 스티커를 사는 것, 이 두 가지 쇼핑의 스트레스 해소 정도에는 큰 차이가 없다. 몰랐다, 나도. 작년에 처음으로 루이비통 가방을 사기 전까지는…… 130만원짜리 빈티지 루이비통 가방을 사기 위해 난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다.

  1. 향후 2년간 새로운 가방을 사지 않는다. (말도 안돼….. 그 이후로 산 가방이 대여섯개는 족히 넘을 듯. 이 가방만 사면 다른 건 당분간 하나도 안 사고 싶을 줄 알았어….)
  2. 3개월간 월 10만원만 쇼핑하기. (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친구, 내 짝꿍까지 셋이서 단톡방을 만들었고 뭐 하나 살 때마다 인증하고 허락을 받았다. 이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너무너무너무, 무조건, 반드시, 꼭, 당장, 사야하는 가방이 17만원이었기 때문에….)

단톡방 이름 “공증” ㅋㅋㅋㅋㅋ 스티커까지 포함해 10만원..

단톡방 이름 “공증” ㅋㅋㅋㅋㅋ 스티커까지 포함해 10만원..

양심도 없이 한달 되자마자 5만원 올려달라고…

양심도 없이 한달 되자마자 5만원 올려달라고…

어린이 날이라고 ‘특별편성’ 해달라고…^^….

어린이 날이라고 ‘특별편성’ 해달라고…^^….

다른 가방 산다고….

다른 가방 산다고….

난생 처음으로 100만원이 넘는 가방을 모셔왔는데, 그 가방만 있으면 당분간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다른 인간들은 모르겠고 일단 내 욕심은 끝이 없다, 루이비통 1개로는 해결되지 않는 욕심이다, 나의 ‘사고 싶어 하는 자아’는 꽤 강력하다, 염치를 모른다. 다만 급격히 차오르는 스트레스 때문에 하는 충동구매는 좀 피해보기로 했다. 갑자기 구매욕이 솟을 때는 대부분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인데, 가령 기껏 수정 다 해줬더니 그 전 시안으로 해달라는 메일이 왔다던가(나는 편집 디자이너다), 일정은 드럽게 촉박한데 디자인 퀄리티는 핀터레스트 급 ‘작품’으로 원하는 고객을 만났을 때, 내가 ‘한글’ 프로그램에서 편집해도 니가 한 디자인 보다는 잘하겠다(또 열받네?)는 평을 들었을 때 등이다. 이럴 때는 주로 텐바이텐에서 스티커나 펜, 노트같은 것을 장바구니에 담고 고르고 골라 결제하는 것으로 급한 불을 껐다.

아마 더 많겠지만

내가 사는(buy) 이유는 더 많겠지만 가장 큰 줄기는 위의 2가지인 듯하다. 카드값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도 ‘사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TCI 성격검사에서 무절제 100이 나오더니 과연, 대단하구나 생각하면서, 이렇게 계속 사제낄거라면 내가 도대체 뭘 사는지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중에 들춰보면서 뿌듯이라도 하게. 그렇게 되면 쇼핑으로 인한 행복이 조-금 더 오래갈 수 있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