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이 시작되고 보름이 지났다. 새해를 맞이하는 첫번째 루틴은 뭐니뭐니해도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는 일,인 분들이 많을텐데 난 다이어리를 사기 위해 꼭 새해가 필요하진 않았다. 금세 질리고 싫증이 나는 바람에 언제든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서 새로운 다짐을 했다. 이번에는 꼭 끝까지 써야지, 하고 한 자 한 자 오바하여 정성스럽게 쓰다가 오히려 지쳐버려서 그 다짐이 지켜진 적이 거의 없다. 그렇게 앞부분, 또는 듬성듬성 채워진 다이어리와 노트들이 수십 권. 그동안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사제껴왔는지를 낱낱히 들춰내보자는 이 레터의 본분에 맡게 작업실에 가져다 둔 ‘다이어리 캐비넷’을 오픈했다.

일부러 모으려고 모은 것은 아니고, 버릴 수 없어서 갖고있다 보니 캐비넷 두 칸을 차지한 다이어리들.

일부러 모으려고 모은 것은 아니고, 버릴 수 없어서 갖고있다 보니 캐비넷 두 칸을 차지한 다이어리들.

고등학교 때 썼던 노트(거의 20년 전..)

고등학교 때 썼던 노트(거의 20년 전..)

별표까지 쳐놓고 좋아했던 시.

별표까지 쳐놓고 좋아했던 시.

사제낌은 언제부터?

저 수많은 다어이리 중에 50%이상 쓴 것은 2~3권정도. 나란 사람.. 중도하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게다가 이렇게나 과감하다니.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또 사? 또 사! 꾸준한 기록에는 재능이 없지만 꾸준하게 사는데에는 재능이 있었던 나. 쓰다만 다이어리들에는 꾸준히 돈 아껴쓰자는 다짐과 다음 달 카드 값과 그렇게 사제낀 나를 혼내거나 책망하는 문장들로 가득했다. 계속 다이어리와 노트를 사제끼면서 정신차려,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니, 아 다른 거 또 사고싶다의 무한반복. 다이어리에는 ‘사제끼는 나’의 정체성이 아주 오래전부터 구축되어왔다는 것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정신차리라’는 말이 수도없이 나옴.

‘정신차리라’는 말이 수도없이 나옴.

대략 10년전에 쓴 것 같은데 아직도 국민카드, 하나카드 잘 쓰는 중…

대략 10년전에 쓴 것 같은데 아직도 국민카드, 하나카드 잘 쓰는 중…

아예 지마켓이 위시리스트에 있었네..? (이준기 배우를 지마켓보다 좋아했다니….)

아예 지마켓이 위시리스트에 있었네..? (이준기 배우를 지마켓보다 좋아했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놀랍도록 나는 변하지 않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놀랍도록 나는 변하지 않았다.

다이어리의 또다른 역할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거 다 의미없다고 새해가 되어도 사소한 계획 하나 세우지 않던 때가 있었다. 미래를 기대하며 해보고 싶었던 것이 하나도 없던 날들. 난 무엇때문에 그렇게 무기력 했을까. 어떤 날은 집에 돌아와 책꽂이나 다이어리 캐비넷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부서져 흩어지는 나를 붙잡아 세우기 위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해서. 실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그랬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으니까. 책과 다이어리 속의 ‘문장들’은 친구들과의 수다와 술 한 잔, 애인과의 다정한 스킨십 등과는 다른 결의 위로를 가져다 주었다.